"한국같은 나라 없다"…현수막에 세금 펑펑 쓰는 이유 [혈세 누수 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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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벽보 선거사범 전 대선 比 3배↑
세금은 계속 들어가는데 가치↓·갈등↑
환경오염도…주요국 현수막 잘 안 써
공직선거법서 선거운동 수단으로 명시
세금은 계속 들어가는데 가치↓·갈등↑
환경오염도…주요국 현수막 잘 안 써
공직선거법서 선거운동 수단으로 명시

투표를 독려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현수막과 벽보가 실험대에 올랐습니다. 선거 때마다 천문학적인 세금이 쓰이는데,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단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종이·천 조각으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 정확한 지출 파악 어려운 현수막·벽보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현수막·벽보. 과거부터 이번 대선까지 얼마나 많은 세금이 들었을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물어보니 구체적으로 얼마를 썼는지 파악이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정당에서 회계 보고를 받을 때, 여러 비용이 합산돼 오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선거보전비용에 포함되는 정당들의 현수막 등을 제외하고도, 선관위가 투표 참여 등을 독려하는 계도·홍보 예산에만 대선 때마다 100억 안팎의 세금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과거 각종 선거에서 거리 게시용 현수막의 통상거래가격(제작·설치·철거비 포함)이 1제곱미터(㎡)당 약 1만5000원인 점을 고려하면, 5미터(m) 현수막의 가격은 개당 대략 7만5000원 정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선거마다 정당별로 거리 게시용 현수막에만 5억 이상의 세금이 투입되는 셈입니다.
선거 벽보는 대선 때마다 100만 부 이상이 쓰입니다. 17대 대선 116만 부, 18대 대선 66만 부, 19대 대선 136만 부, 20대 대선 126만 부가 선관위에 제출됐습니다. 10명 이상의 후보가 나타난 대선의 경우, 선거벽보(사이즈 76 x 52센티미터(㎝))만 일렬로 쭉 세워놓으면 약 960km, 서울-부산 왕복보다도 긴 줄이 됩니다.
◇ "지금 방식, 최선 아냐"

실제 입법조사처는 2023년 보고서를 통해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난립은 정당 활동 홍보가 아닌 정치를 외면하게 하는 요인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특히 최근처럼 정치가 양극단을 달리고 있을 때는 갈등과 혐오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습니다. 실제 경찰도 이번에 현수막·벽보 훼손 등 선거사범 증가 요인 중 하나로 진영 간 갈등을 꼽았습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해 수준의 용어들이 쓰이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래도 현수막이나 벽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없진 않습니다. 조은옥씨(78)는 "붙여놔야 선거하는 맛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주요 정당, 인물 말고 나머지는 모른다. 현수막이나 벽보를 보고 '아 저런 사람도 나왔구나' 싶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 행정력 낭비에 환경 오염까지

재활용도 어려워 환경 오염 문제도 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수막은 각 지자체에서 재활용 방안 등을 강구하고 있지만 재활용 비중 30%도 안 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주성분이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플라스틱 합성수지인데, 태우면 다이옥신 같은 유해 물질이 나온답니다. 대부분 재활용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공공 쓰레기 처리 마대용 등입니다. 재활용엔 소각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가고 있어 재활용도 꺼려지는 분위기입니다. 코팅된 벽보도 재활용이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재활용되지 못하는 것들은 결국 각 지자체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 "한국같이 현수막 거는 나라 없다"

진일보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혈누탐팀은 전문가들과 함께 조금 다른 제언을 해보고자 합니다.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실효성이 떨어지는 선거홍보물을 애당초 쓰지 않거나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선거 때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미국·대만·아르헨티나·일본·엘살바도르·핀란드 등을 다 방문했다는 이 교수는 "한국같이 현수막 많이 거는 나라는 없다"며 "한국 유권자들이 이미 선거 관련물을 많이 접하는 TV·신문·유튜브 등 매체를 더 활성화하고 과거 형식의 현수막·유인물 등 홍보는 줄이거나 없애는 식으로 가는 게 어떨까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춘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벽보가 사라지면 거의 정치에 대해 접할 기회가 없다"는 우려를 제기하면서도, 외국에 비해 한국의 선거 홍보 방식에 규제가 많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후보들의 광고 게재 횟수는 TV·라디오 각각 30회, 신문 70회로 제한되고, 인터넷광고는 인터넷 언론사에만 가능합니다.
세계 주요국들은 대체로 선거법에 선거운동에 대한 세부 규정이 많지 않아 다양한 유형의 선거 문화가 발달했는데, 한국은 공직선거법에서 현수막과 벽보를 선거운동의 수단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트렌드는 온라인 선거운동입니다. 지난해 6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여론조사 결과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의 18~34세 젊은 유권자의 32%가 극우 국민연합(RN)을 뽑으며 당시 압승을 뒷받침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배경에는 틱톡·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세계 주요국 추세에 맞춰 우리 선거 문화도 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혈누탐팀은 선진적이고도 세금 낭비 없는 대한민국 선거를 기대합니다.
신현보/이민형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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